일상

내가 선수가 될 거야

아솔 2022. 8. 5. 23:43

 

 

요즘 우리 부서는 끝없는 보고서 수정과 긴급 지시에 팀원 모두가 한계에 부딪혀가고 있다. 몇 달에 한 번씩 저 높은 분을 위해 쓰고 있는 보고서. 하지만 이 보고서를 제출한 후에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모른다. 그냥 쓰라는 대로 쓰고 또 쓰고, 야근하고 또 야근하고... 분위기 좋기로 소문난 우리 팀이었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자리에서 우는 사람과 책상에 도시락을 쾅 하고 던지는 사람까지... 서로 감정 조절도 안되고 정말 난장판이었다.

 

오후에 출근하신 상무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상무님께서 이 보고서 업무에도 의미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보고로 인해 회사 사업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그 영향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최근에 이 보고서와 미팅 덕분에 우리회사가 A사업, B사업, C사업도 진행할 수 있게 됐다고 하셨다. '그랬군요. 하나도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충격이었다. 보고서의 주요 작성자 중 한 명인 나는 이 보고의 결과에 대해 아무런 공유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내가 굳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곳에서 정말로 '부품'이니까. 이 회사의 사업이 농구 경기라면, 임원들과 그 윗분들이 플레이어이고, 나는 농구장을 청소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는 경기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지만, 청소부가 경기의 결과를 알 필요는 굳이 없으니까. 감독이 청소부에게 경기 결과를 알려주지는 않으니까.

 

상무님은 좋은 뜻으로 업무에 더 자부심을 가지라고 하신 말씀이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마치 매트릭스에서 빨간약을 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남의 경기장을 치워주면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조기축구회라도, 집 앞 공놀이라도 내가 선수로서 경기를 하고 싶다. 남의 경기에 일조하는 기쁨이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나는 아니다. 이 대화 후에 나는 더 확고해졌다. 이 곳을 떠나서 내가 선수로서 경기에 참여하며 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