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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사랑은 고작 그런 게 아니야,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상식적인 말이지만, 사랑 따로 대상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나와 사랑과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각자 따로 존재하다 서로 플러스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노동이거나 거래지. 그러므로, 노동이나 거래가 아닌 제대로 된 사랑을 꿈꾼다면, 반드시 환기해야 한다. 사랑과 대상과 나 사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사랑하는 대상,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13~15쪽, 프롤로그)

 

다른 블로그에서 이 프롤로그를 읽고 바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렸다. 읽는 내내 고미숙 선생님의 철학과 논리에 빠져들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20대부터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나에 대한 상대의 애정의 크기였다. 마치 사랑의 성패가 상대가 나를 얼마나 갈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아니, 나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행복한 커플은 남자주인공의 끝없는 구애와 집착에 가까운 정성으로 만들어지곤 했고, 그것이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책 속에서 한 문장 한 문장 고미숙 선생님께 대차게 뼈를 맞으며 나는 그동안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저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파악하셨던 거죠..? 절 아시나요 선생님..?) 지금까지 내가 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 연애들은 대상에 의해 그렇게(?) 되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대로, 내가 설정한 관계대로 흘러갔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덧붙여 사랑과 우정 사이의 깊은 단절도 이런 양상과 맞닿아 있다. 사랑과 섹스도 가까운 개념이지만, 사랑과 우정 역시 이웃사촌이다. 하지만, 사랑과 섹스 사이에 만리장성이 가로놓여 있듯이, 사랑과 우정 사이에도 아주 깊고 차가운 강이 흐른다. 남녀 사이에는 우정이 불가능하다-모든 멜로의 대표적인 공식구 중의 하나다. 대체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과 우정의 차이를 견뎌 내기가 힘들어서다. 그럼, 차이가 대체 뭐지? 배타적 소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은 존재를 '통째로' 차지하는 것인 데 반해, 우정은 그런 식의 독점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결국은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승부를 걸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모든 연애는 '차거나 차이거나' 하는 양분법적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소유 문제는 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일단 여기서는 두 가지 질문만 던져 두기로 하자. 사랑이 정말 소중하다면, 또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어떤 조건하에서 어긋나게 될 경우, 우정을 통해 그 열망을 지속시키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아니, 그 이전에 사랑과 우정 사이를 가르는 이 지독한 이분법이 삶의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과연 유용한 전략인가? (54쪽, 지독한 이분법들)

 

그러게. 왜 배타적 소유 또는 영원한 단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믿어왔지? 그치만 여러 이유로 사랑이 되지 않을 때 우정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딱히 의미있는 일일까?

 

 

사람은 평생 단 하나의 병만을 앓는다는 말이 있다. 신체적으로 볼 때, 하나의 약한 고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병들이 변주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사람은 평생 단 한 종류의 연애만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위안이나 동정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진정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법이다. (78~79쪽, 사랑엔 공부가 필요없다?)

 

중요한 건 위안이나 동정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법을 배우는 것.

 

 

무엇보다 '자기'로부터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중략)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존재의 궤적을 만든다. 존재의 흐름과 궤적, 그것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한다. 내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종결까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내 안에서 사랑이 어떻게 일어나고 소멸되는지를 철저히 살피겠다는,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괴물"과 맞짱을 뜨겠다는 승부욕이 있어야 한다. 딱 그 의욕과 의지만큼 '자기'로부터 떠날 수 있으리니. (145쪽, 청춘이여, 욕망하라!)

 

하지만, 대개의 바람은 이렇지 않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다 누리면서, 다시 말해 자신은 단 한 가지도 달라지지 않으면서, 거기에 더하여 뭔가가 왔으면 좋겠다 싶은 것, 그런 걸 소망이요 꿈이라 착각한다. 로또가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사랑을 원하는 것이나 똑같은 패턴이다. 소위 사랑밖엔 난 몰라, 를 외쳐 대는 순정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틈만 나면, 세상에서 젤 소중한 건 사랑이라고,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처럼 떠들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 커녕 지금 누리는 부와 명예,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그 위에 나를 사랑해 줄 어떤 대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경우가 태반이다.(186~187쪽, 실연은 없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다 누리면서 거기에 더하여 뭔가가 왔으면 좋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바람부터가 계산적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장사를 하는 건지 사랑을 하는 건지 묻던 법륜스님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정에도 많은 학습이 필요하다. 좋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아주 다른 삶, 낯설고 창발적인 사유와 생활을 선물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매끄러운 흐름, 그것이 바로 코뮌주의자의 사랑법이다. 실제로 공동체를 하면, 사랑과 우정 사이가 그렇게 확연히 갈라지지 않는다. 사랑과 우정이 공존할 수도 있고, 사랑은 아니지만 끈끈한 우정이 가능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아닌 게 아닌 것도 아닌 채로. 윽, 헷갈린다. 그야말로 n개의 성, n개의 관계가 가능한 셈이다. (267~268쪽, 에필로그 '천 개의 사랑, 천 개의 길!')

 

n개의 성, n개의 관계라는 말이 참 인상깊었다. 틀에 박혀 살고 싶지 않다고 늘 말해왔으면서, 왜 관계에 대해서만큼은 남들이 하는대로, 좋다고 말하는대로 딱 그 모습 그대로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결국 사랑을 제대로 하려면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최종적 결과(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까, 없을까?)에 집착하지 말고 사랑의 폭풍 자체를 음미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기승전 삶의 주체성! 오랜 만에 망치로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을 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