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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처음 들은 노래

 

지난 토요일은 작사학원 재등록 첫날이었다. 첫 시간에 선생님은 노래를 전문가처럼 들어야 한다면서, 보컬만 듣지말고 악기별로 하나씩 집중하며 들어보라고 말씀하셨다. 어제 퇴근길에 문득 그 말씀이 생각나 장범준의 노래를 그 방법대로 들어보기로 했다. 선곡은 요즘 매일같이 듣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로 완료.

 

일단 기타치는 장범준이니까 기타부터 들어보자 했는데, 노래가 시작하자마자 다른 악기에 묻혀 알아 듣기가 힘들었다. 흠, 기타는 너무 어려우니 소리가 큰 드럼을 따라 들어봐야지. 그런데 듣다보니 쿵짝 쿵쿵짝 하는 소리 사이사이로 츠츠, 치치(?)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박자를 타고 들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드럼인가?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사운드였는데, 한 번 들리기 시작하니 1절에서부터 꽤 크게 들렸다. 그 다음으로는 피아노 따라가는데, 엇, 갑자기 디브릿지부터 현악기가 들렸다. 현악기도 나왔었나? 도대체 이 소리들이 다 어디 숨어있던 거지? 잠시 후에 갑자기 둥둥둥 울리는 베이스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시내 거리를 걸으면서 이어폰으로 듣는데도 아주 잘 들렸다. 그동안 한 번도 베이스 소리를 구분해서 들었던 적이 없는데, 이렇게 큰 소리를 어떻게 못 들을 수 있었던 걸까?

 

베이스의 발견(?) 이후로도 중간에 오르간 같은 '삐~띠리릭' 하는 소리와 2절 후반부의 바람소리같은 효과까지, 한 번씩 재생을 할수록 새로운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 노래를 매일 들으면서도 한 번도 이렇게 다채롭게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예전과 180도 달라진 노래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듣는 귀가 없었구나. 삼십년 넘게 반쪽짜리도 아니고 십분의 일쪽짜리인 노래만 듣고 살아왔던거다. 처음으로 악기를 구분해서 듣기 시작한 노래는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맛있는 진수성찬을 차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베이스를 듣다가, 피아노를 듣다가, 보컬을 듣다가, 서핑을 하듯 여기 저기를 타고 다니면서 노래를 듣는 맛은 훨씬 좋았다.

 

장범준의 이 노래를 매일 들었었지만, 어제의 그 순간에 나는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노래라는 걸 처음 들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노래를 들을 줄도 모르면서 가사를 쓰겠다고 말해왔다니,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앞으로 그동안 듣던 노래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들어봐야지. 어떤 다채로운 사운드와 세계가 나를 놀라게 할지 기대된다. 무엇이든 없는 게 아니라 '나에게 보는 눈이 없는 것, 듣는 귀가 없는 것, 느낄 줄 아는 감각이 없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기도 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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