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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즐겁고 당당한 싸움의 철학,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김민식 지음, 푸른숲

 

김민식 피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공영방송 파업을 그렸던 2017년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을 봤을 때다. 영화 속에서 혼자 '김장겸은 물러나라!'라고 외치며 페이스북 라이브를 하던 모습이 인상깊어 기억에 남았는데, 마침 회사 인근 도서관에서 그의 강연이 열리게 되어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강연은 참 재미있었다. 한양대에 다니면서 중앙대 자전거 동아리 활동을 했다는 상식을 깨는(?) 인생 이야기에 나는 또 한 번 반했고, 질문 답변 시간에 영화 <공범자들>에 관한 질문을 했다. 김민식 피디가 마치 영화 GV에 온 것처럼 많은 분들이 <공범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어서 기쁘다고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후로 나는 김민식 피디의 팬이 되어 매일 그의 블로그 방문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서들을 읽고, 또 그의 베스트셀러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에서 추천한 방식으로 영어문장 외우기에 도전하기도 했다(비록 완주는 하지 못했지만.....).

 

마침 선거일이었던 오늘, (사전 투표를 마치고) 하루 종일 집콕하면서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를 완독했다. 대학 때 데모도 한 적이 없고, 운동이나 노조에는 관심도 없던 자칭 딴따라 피디가 어떻게 언론 노조 부위원장이 되어 길고 긴 싸움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싸움의 대가로 어떤 시련을 겪었는지가 자세히 나와있었다. 구속영장이 청구되고, 회사에서 33억 손해배상 소송을 걸고, 인사위 징계를 받는 상황에서 그는 당당하고 소신있게 싸움을 계속 했다. 특히 '김장겸은 물러나라' 사건으로 인사위에 회부되었을 때의 이야기에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는데, 아래에 일부분 옮겨 적어본다.

 

두 번째 인사위에 회부됐을 때,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배운 싸움의 기술을 적용했다. 끝없이 지는 것이다. 싸움을 끝내지 않는 것이다. 상대가 항복이라고 외치고 물러날 때까지 나의 타임루프 안에 상대를 가두는 것이다. 징계를 위한 인사위에서 징계 대상자에게는 소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만약 내가 소명을 끝없이 계속한다면 그동안 인사위는 끝나지 않는다. 소명을 다 듣지도 않고 징계한다면 법적 효력이 생길 수 없다. 이제 나는 인사위에 불려간 징계 대상자가 아니라, 시간의 틀 속에 임원들을 가두는 마법사가 된 것이다. (243쪽)

 

그가 마법사로서 어떤 타임루프를 만들었는지는 책으로 직접 보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적지 않는다. 내가 손자병법을 읽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 수준이면 그에 맞먹는 전략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인상깊은 병법이었다. 정윤회의 아들을 엠비씨 드라마에 꽂으라는 압력을 언론에 제보하고, 이에 대한 드라마국 본부장의 거짓 해명글에 실명으로 정면 반박하는 부분에서는, 어떤 협잡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용기와 자유로움이 존경스럽고 또 부럽기도 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도 부조리가 넘쳐나고, 최근에는 회사 기밀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직원들의 전자기기와 기타 모든 것을 사찰할 수 있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을 요구했지만, 나는 그에 저항할 용기도, 또 찍히면서까지 이 회사를 바르게 만들고 싶다는 애정도 없으니까. 부끄럽고 씁쓸하지만 말이다.

 

청와대 낙하산 인사로 언론 자유를 빼앗겼던 시절을 지나, <공범자들>의 연출이었던 최승호피디가 2017년 엠비씨 사장이 되고, 이용마 기자 등 해고자들은 전원 복직되었다. 그러면 이제 공영방송은 제 자리를 찾았을까? 나는 뉴스를 잘 보지 않지만, 요즘 엠비씨가 김민식 피디와 수많은 사람들이 되찾고자 했던 모습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한 싸움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번엔 반대쪽(?) 친정부 뉴스가 된 상황에서 이 책을 보니 참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김민식 피디의 의견을 묻고 싶기도 한데, 그가 뭐라고 대답할 지는 잘 예상이 되지 않는다.

 

'싸워야 할 때 달아나지 않는 것이 인생에 대한 예의다.' 그는 인생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그것도 아주 유쾌하고 즐겁고 당당하게. 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7년동안 드라마 피디로서 일을 할 수 없었고, 사람으로부터 많은 상처도 받아야 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 책이 인생의 다음 단계를 맞기 위해 꼭 하고 넘어가야 했던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동안 쌓였던 상처와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을 풀어내고, 싸움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전환점으로서 말이다. 그가 이 책 이후에 어떤 주제의 책으로 다시 돌아올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