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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타인의 입장에 대하여,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허혁 지음, 수오서재

 

초등학생때부터 20년 넘게 버스를 타온 시절을 돌아보면, 대부분의 버스기사들은 친절하지 않았다. 승객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혼자말로 쌍욕을 계속하거나 또는 심한 난폭운전을 해서 버스에서 내릴때까지 벌벌 떨게하는 기사들도 많았다. 나는 늘 버스기사들이 불친절한 것에 불만을 가져왔는데, 단 한번도 버스기사의 입장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버스를 운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출발한 버스가 뒤늦게 뛰어오는 사람을 태워주지 않는 것은 출발하자마자 서는 것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없었고, 하루 열여덟 시간 운전하는 '사람'의 스트레스 상태와 감정 노동의 강도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지금은 법이 바뀌어 열여덟 시간 운행은 사라졌다고 한다). 승객이 기분 나쁜 만큼 기사도 승객때문에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버스라는 공간이 승객을 이동시켜주는 수단만이 아닌 버스기사의 업무 공간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누구나 그들만의 사정이 있다.

 

자주 들어본 말이고, 아마 나는 이 말을 몇 번 쯤은 인용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이 단순한 진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구나 그들만의 사정이 있다.' 하지만 그 입장이 되기 전에는 결코 그 사정에 대해 완벽히 알 수 없다. 상대의 입장이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그들만의 사정에 대해서 나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나는 상대의 행동에 대해 재단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없다. 나는 모르기 때문이다. 비단 버스기사와 승객의 관계 뿐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러하다. 상대는 다만 그의 입장에서 옳은 일을 할 뿐인 것이다.

 

아무리 불량기사라도 마음 한편에는 승객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데 큰 보람을 갖는다.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 버스운전을 하는 사람은 없다. 나란히 신호대기에 걸려 서 있는 옆 버스를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다.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머리를 맞대고 속삭이는 연인, 이어폰 끼고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어떤 학생, 주말 가족여행지의 맛집을 검색 중인 안경 낀 아저씨, 모두가 자신의 삶과 일상의 버스 여행에 만족해 보인다. 삶이 언제나 그렇듯 내가 운행하는 버스만 유독 소란스럽다. 소음이 제거된 옆 버스는 마치 순정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라디오에서 멋진 음악이라도 흘러나오고 있으면 옆 버스의 풍경은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한다. (178~179쪽)

 

이 책을 읽으면서, 태어나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시각을 빌려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머리에 띵한 울림이 왔고, 버스기사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면서 버스를 타는 시간이 조금 더 좋아졌다. 타인을 이해하게 되면서 내가 더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사실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았던 버스기사는, 결코 내가 미웠던 게 아닌 것이다! 누구보다 따듯한 애정으로 승객과 동료 버스기사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함께 따라가면서, 짠하고 애틋한 감동도 느낄 수 있었다.

 

글은 재주가 아닌 삶으로 쓰는 것이 맞나 보다. 이 책에 담긴 투박하지만 진실된 삶의 모습이 어느 명문장보다도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으니 말이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새해의 첫 행운인 것 같다. 책이라는 것을 왜 읽는지를 알게 해준 소중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