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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회식 단상

#1 투표의 위험성


오늘은 우리 파트가 새로 조직된 이후 처음으로 맞은 회식 날.

장소 예약을 담당한 김사원이 아침부터 회식 장소 투표 메일을 보냈다.

후보 1. 조개전골

후보 2. 양고기

메일을 개봉하자마자 조개 전골이 끌린 나는 익명 투표창에 1번을 눌렀다.

몇몇 파트원들이 투표를 하던 중에, 갑자기 파트장님이 장소 투표 메일에 전체 답장을 보냈다.


Re: 저는 2번 양고기요.


음..?

깜빡깜빡. 모니터에 김사원의 긴급 메세지가 왔다.

"대리님, 이거 그냥 양고기집 가자는 건가요ㅠㅠ?"

"음.. 아마 투표하는 방법을 모르셨을 수도ㅠㅠ?"

당황하던 사이, 여차저차 파트장님이 투표 방법을 몰라서 답장으로 쓰셨다는 것을 알고 한숨 놓았는데,

최종 투표결과가 1번 조개전골이 되어버려 김사원은 더 난감해졌다.

"대리님, 저 어떡하죠ㅠㅠ?"


결국 파트장님의 너그러운(?) 양해로 조개전골을 먹게 되었지만,

조개전골에 투표한 사원 대리들은 은근한 눈칫밥에 조개를 실컷 말아먹고 배를 두들기며 회식 1차를 마쳤다.



#2 이것은 농담일세


회사를 다니면서 "일부" 아저씨 집단에 대해 정이 떨어진 면이 있는데, 이유 중 하나는 그들만의 경계 모를 "농담" 때문이다.


"저 고등학교 때 일본 여고생이랑 펜팔 했었잖아요. 걔가 테이프(노래)도 보내주고 그랬어요."

"무슨 테이프? 비디오?"

"걔 고등학생 맞아? 중학생 아냐?"

"푸하하하!"

2차 자리가 끝날 무렵 결국 터진 방언들에 나와 김사원(여)은 아재들을 외면하며 조용히 눈을 마주친다.


"나 사내 기숙사 살 때 1년에 기숙사에서 열 번도 안잤어."

"어, 상무님(유부남) 맨날 기숙사 가신다고 하셨던 건 뭐에요?"

"여자친구 만나러 간거였지~"


.......


순간 정적이 흐르고 당황한 상무님이 말을 잇는다.

"야, 농담이야 농담~ 너네(여사원들) 왜 외면해 농담이야~"

가끔 쌩뚱맞게 솔직한 심사원이 갑자기 입을 뗐다.

"저는 근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모든 농담은 진실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


갑분싸. 이것이 정녕 갑분싸라는 것이었구나.

모두 그대로 얼어버리고 분위기는 급하게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아마 오늘 이후로 상무님의 여자친구 드립은 더이상 없겠지. 가끔 눈치 없던 심사원, 오늘 좀 신선한데?!



#3 상대평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부서 회식 문화가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술 강요, 2차 강요가 없다. 맥주 반잔으로 개기고 1차 마치고 집에 가도 잡지 않는다.

술 안마신 사원을 마치 대리기사 부리듯 자기집까지 운전하도록 시키는 갑질 따위도 없다.

적어도 여사원 한 명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자기들끼리 노래방 도우미 얘기를 하는 집단은 아니다.

그 모든 걸 갖췄던 이전 부서와 비교하면, 상대평가 A++인 것이다.


회식이 끝나고 김사원과 같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이만하면 잘 끝났네요."

"맞아요 맞아요."

7000번 버스에 올라타 오늘의 명장면과 심사원의 한 방을 떠올리며 혼자 키득댄다.

친구에게 전화해 미주알 고주알 회식 뒷담화(?)를 하는 대신, 오늘의 일화를 글로 쓰기 위한 정리를 해본다.

회사원의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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