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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아빠와 TV

나는 스물을 훌쩍 넘긴 성인이지만 엄마, 아빠, 동생과 같이 살고있다. 재작년 정년퇴직하신 아빠는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여 엄마의 부동산을 함께 운영하고, 섹소폰 동호회에서 여가를 즐기며 사시는 중이다. 아빠와 나의 관계는 역사가 길고 굴곡도 많았지만 요즘은 그런대로 무난하게 지내는 편이다. 딱 하나, 사소한 그의 행동들을 못마땅해 하는 '나의 마음'만 빼면 말이다.

 

아빠는 집에 계실 때면 늘 티비를 본다. 어릴 적엔 집에서 책을 보거나 영어공부를 하는 모습도 자주 보이셨는데, 퇴직 후에는 항상 뉴스(7시, 8시, 9시 뉴스까지 끝이 없다), 역사, 중국사극, 정치토론에 관한 티비와 유투브를 틀어놓고 있다. 그리고 논평과 비판, 비난, 내 그럴줄 알았지 등의 평을 자주 하시는데, 그 정치관 및 철학이 나와 반대인 것들이 참 많아 나는 최대한 그 자리를 피하는 편이다. 물론 이건 빅매치를 몇 번 겪은 후의 노하우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나는 이런 아빠의 뉴스 집착(?)이 못마땅하다. 하루종일 뉴스를 보고 욕만 하는데 도대체 뉴스를 왜 보는건지. 경제, 정치 상황을 파악하고 생산적인 일에 활용하거나, 이면에 숨겨진 언론사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경제 지표를 보고 액션을 취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차피 뉴스를 보든 안보든 다음 번 선거에서 찍을 번호는 하늘이 두쪽나도 바꾸지 않더만.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는 착각과 자기 위안만 가질 뿐, 바보 상자의 눈속임에 시간을 헌납하는 모습이 답답하게만 보였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된장에 밥을 비벼 먹으며 티비앞에 앉는 아빠를 바라보다가, (자주 그렇듯 아빠는 티비를 켜놓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엄마가 없으면 한없이 초라해질 한 남자를 생각하다가,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것들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작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도박이나 빚을 진 것도, 술주정을 하거나 바람을 핀 것도 아니고 그냥 티비를 보는 것 뿐인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내가 존경하는 책 속의 멘토들은 아빠와는 달랐다. 꿈을 좇고 정의를 말하고 큰 시야를 가졌으며, 무엇보다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로운 인생을 개척했다. 아빠는 그저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남들의 시선과 체면을 신경쓰고 대세에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아왔고, 그래서 많이 행복하거나 자유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저 평범했기에 나는 많은 것을 누리기도 했다. 얼마 전 본 뮤지컬 '영웅'의 안중근이 아니었기에 나는 부모님과 함께 유년기를 보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사회 정의에 앞장서는 이가 아니었기에 나는 등따시고 배부르게 클 수 있었다.

 

아빠는 나에게 1등을 해야 한다고 강요한 적이 없는데, 왜 나는 아빠가 탁월한 1%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이길 원했을까. 타인의 기준에 갇혀 사는 아빠가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길 바라서이기도 했지만, 그의 삶을 내 잣대로 평가하는 나의 오만과 욕심이기도 했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참 별 걸 갖고 꼬투리를 잡는 딸이라 욕해도 할 말이 없다. 여전히 티비 앞에 앉아 졸고 있는 아빠를 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사과를 해본다.

'미안해 아빠, 내가 참 웃기고 못됐어. 평범한 그 모습 그대로 내 곁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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